비류(沸流)의 건국신화
서기전(西紀前) 36년 고구려 시조(始祖) 주몽(동명왕)이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나라를 세웠다.
부여왕(夫餘王)은 아들이 없었고 다만 딸이 셋이 있었다. 북부여(北夫餘)에서 난(難)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夫餘)로 망명(亡命)해온 주몽(朱夢)이 사람됨이 비범한 것을 안 부여왕 (夫餘王)은 그의 둘째딸 소서노(召西奴)를주몽에게 주어 처(妻)를 삼게 하였다. 얼마 아니 가서 왕이 죽으니, 주몽이 사위로 왕위를 이어받아 고구려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소서노(召西奴)는 과부(寡婦)로서 전처의 아들 비류(沸流)가 있었고, 주몽과의 사이에 온조(溫祚)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주몽은 북부여에 있을 때 이미 예씨(禮氏)라는 여자와 정혼(定婚)하여 유류((孺留) 또는 유리(孺璃)를 출산케 한 바 있었다. 그 유류가 장성한 후 아버지 주몽을 졸본부여로 찾아오니 주몽의 입장도 난처하고 동복이형제(同腹異兄弟)인 비류와 온조도 불안하던중에 주몽이 예씨의 소생인 유류를 태자(太子)로 세우니 비류등 동복 이형제는 주몽이 죽은 뒤에 닥쳐올 무서운 피해를 미리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모국(母國) 을 떠나 남하(南下)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 때 조우(鳥于), 馬자등의 10신(臣)이 따라오고 그 밖에 많은 백성들이 함께 남하하여,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삼각산(三角山)에 올라 주위를 두루 살펴 지세(地勢)를 관망할 때 따라온 10신(臣)이 말하기를 " 여기서 사방(四方)을 살펴보니 북쪽은 한수(漢水)를 끼고 수리(水利)가 매우 좋으며, 동편은 중첩된 높은 남악(南岳)을 싸안고, 남으로는 비옥한 택야(澤野)가 펼쳐 있으며 서쪽은 대해(大海)가 가로질러, 그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한 나라를 세울만한 곳으로는 다시 얻기 어려운 곳이니, 여기에 왕도(王都)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천리(天理)인가 하나이다." 라고 아뢰니, 온조가 비류에게 그 가부(可否)를 묻자 비류는 "아우나 여기(위례(慰禮))서 나라를 세우라, 내 생각 같아서는 이런 고원지세(高原地勢)에 나라를 세워보았댔자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길로 서쪽 해안지세(海岸地勢)로 나아가 평지에 도읍을 삼고 따로 나라를 세우겠 다." 고 말하니 10신(臣)이 다시 일제히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대신들을 인솔하고 서행(西行)하여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미추홀(彌鄒忽)]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때 는 고구려(高句麗) 2대 유리왕 2년이고 신라(新羅) 혁거세(赫居世) 40년 한성제(漢城帝) 가 홍(嘉鴻)3년(서기전 18년)이다.
비류가 문학산 일원(一圓)을 중심으로 [미추홀(彌鄒忽)]을 세워 백성을 다스려보니 원래 땅이 좁고 습(濕)한데 다가 해변이라 물이 짜서 많은 백성들이 정착생활(定着生活)하기에 매우 곤란하여 치국경영(治國經營)을 지속 시킬 수 없으므로 몇해 동안의 건국사업(建國事業)이 여의치 못하게 된 비류는 온조의 십제((十濟), 백제의 전신 (前身))를 살피기 위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찾아본 즉 도읍이 바로 잡히고 국기(國基)가 튼튼하여 백성이 안거 낙업(安居樂業)하고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 있어 마침 내 자결(自決)하니 그가 이끌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모여들어 그 때부터 백 성들이 즐겨 살게 되었다는 전설(傳說)이다.
줄타기 명수 김상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2년(年) 4월(月) 8일(日) 조(條)에「결사책진기악백호철연위악」(結絲冊陣技樂百 徹庭僞樂)이라 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2년(年) 5월조(月條)에 재악백희팔방공인(材樂百戱八方公人) 1350 여인개성실정태락(餘人皆盛飾庭泰樂)이라는 글이 있다.
우리나라 고대(古代) 백희중(百 中)에는 농환(籠丸), 주색(朱索)승도(繩渡), 줄타기, 번신(飜身)도약기(跳躍技), 땅재주, 봉(捧)놀이, 씨름 가면무(假面舞)놀이, 인형(人形)놀이, 사자춤등 지상(地上) 기예(技藝)무잉(無剩), 놀이들이 성행하였다. 약 200년(年) 전에는 인천 전재리(全才理)현 구월동(九月洞)에 줄을 잘 타는 재인(才人)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줄타기 (주색(走索) 또는 승도(繩渡)라 한다) 명수(名手)인 김가(金家)가 있었다. 헌종(憲宗)때 궁중(宮中)에 경사가 있었는데 그 때 전국에서 재인(才人)들을 뽑 아들여 각기 묘기를 부리게 하였다. 김상봉(金上峰)이 줄을 잘 타자 헌종은 그의 기술을 칭찬하고 「우두머리」라는 뜻의 상봉(上峰)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김상봉(金上奉)은 근세(近世) 줄타기의 중시조(中始祖)이다. 그는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 최가(崔家)인 제자는 왕(王)으로부터 상천(上天)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상천(上天)이란 줄타기 윗사람이란 뜻이다. 최상천(崔上天)은 한양(漢陽)으 김관포(金官포)와 광주(廣州)의 이풍운(李風雲)에게 전수시켜 줄타기 기법(技法)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줄타기 천재(天才) 김상봉(金上奉)의 기법(技法)은 우선 평지(平地)에 줄매기를 한다. 13m 거리의 양편에 가위 사복으로 약 7m 기둥을 양쪽에 세운다.
줄은 「8부」삼끈줄을 늘여 양쪽 말뚝에 단단히 매어 진동이 조금도 없게 한다. 줄을 탈 때에는 부채를 들고 버선발로 줄에 올라 줄 위에서 갖은 재담(才談)을 부리며 줄을 탄다. 그의 묘기(妙技)는 43가지나 된다.
김상봉(金上奉)의 43가지 묘기는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김상봉(金上奉)은 인천(仁川)의 큰 보배였다.
1. 앞으로 걸어가기 | 2. 뒤로걸어가기 | 3. 앞으로 종종걸음 |
4. 뒤로 종종걸음 | 5. 서서 돌아가기 | 6. 앉아 좌우로 돌기 |
7. 닭의 홰타기 | 8. 닭의 홰타고 좌우로 희기 | 9. 외홍채비 |
10. 외홍채비 풍치기 | 11. 양다리 외홍채비 | 12. 쌍홍채비 |
13. 겹쌍홍채비 | 14. 옆쌍홍채비 | 15. 옆쌍홍채비 거중틀기 |
16. 쌍홍채비 거중틀기 | 17. 외무릎 희기 | 18. 외무릎 치기 |
19. 오무릎 가새트름 | 20. 외무릎황새 두렁넘기 | 21. 외무릎 희기 |
22. 두무릎 풍치기 | 23. 두무릎 가새트름 | 24. 두무릎 황새 두렁넘기 |
25. 두무릎 종종 희기 | 26. 책상다리 | 27.책상풍치기 |
28. 책상가새트름 | 29. 책상다리 | 30. 앞쌍홍채비 |
31. 칠분뭔장 | 32. 앞칠보 춧칠보 | 33. 칠보 다래치기 |
34. 칠보 거중틀기 | 35. 허공채비 | 36. 앵금뛰기 |
37. 종급 붙이기 | 38. 칠보 보십배기 | 39. 깃발 붙이기 |
40. 배돛대서기 | 41. 살판 | 42. 얼음치기등 |
장사 추연도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추연도(秋淵道)는 조선말엽(朝鮮末葉)에 인천(仁川) 오동면(烏洞面) 안락(安樂)마을에서 평민 (平民)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대대로 영의정(領議政) 김재구(金在龜)의 묘지관리인(墓地管理人)이었다.
추연도(秋淵道)는 당시 세도가(勢道家)인 청풍김씨의 권세만 믿고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려 인천부관청(仁川府官廳)에서는 큰 골칫거리로 여겼으나 정승의 묘지기라서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다. 추장사(秋壯士)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피해자들의 고발이 빗발쳤으므로 인천부사(仁川府使)는 할 수 없이 그를 잡아들여 불량배(不良輩)라는 표시로 쇠를 달구어 얼굴에 쇠도 장을 찍어 내보냈다. 추장사(秋壯士)는 흉측한 얼굴을 하고도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여전히 행패를 부렸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자리를 피하였다.
추장사(秋壯士)가 한양(漢陽)에 가 있을 때 별안간 난리가 일어나 모두들 급히 피난을 가려 하였으나 성문(城門)이 굳게 닫혀 있어 나갈 수 없었다. 그 때 추장사(秋壯士)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성문(城門)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추장사(秋壯士)는 자물쇠를 맨손으로 비틀 어 부수고 성문(城門)을 열어 주어 모두들 안전하게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불량배라고 낙인 찍혔던 추장사(秋壯士)도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으니 사람들은 그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장사고을 팔장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임진왜란(壬辰倭亂)이후 우리나라는 피폐하여 관리(官吏)들이 수탈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도둑이 날뛰었다. 백성들은 도둑이 두려워 안심하고 잠 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천(仁川)에도 예외없이 도둑들이 들 끓었다. 인천(仁川)의 장자 (壯者)고을은 도로변(道路邊)이라서 주막집이 몇 집 있었다. 어느날 밤이 되자 수상한 장정 들 여러명이 주막을 찾아와서 술을 먹고는 떠나지 않았다.
주모가 그들의 눈치를 보니 도둑 같아서 몰래 자기 남편을 시켜서 동네 청년들에게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동네 팔장사(八壯士)는 도둑을 일망타진할 것을 굳게 결의하고 무기를 들고 도둑이 올 길목에 숨어 기다렸다.
자정쯤 되자 그 도둑들은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을 침입하여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하기 시작하였다.이 때 마을 팔장사(八壯士)는 도둑질 하기에 몰두해 있는 도둑들의 총과 무기를 빼앗고 그들을 붙잡았다.
도둑들을 끈으로 묶어 인천(仁川) 포도청에 넘겨졌다. 사또는 팔장사 (八壯士)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후부터는 팔장사(八壯士)가 두려워 장자(壯者)마을 근처 에는 도둑들이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첩열녀(童妾 烈女)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도림동(桃林洞) 오봉산(五奉山) 아래 길옆에는 인천(仁川)에서 가장크고 웅장한 신도비(神道碑) 가 서 있고 그 곳에서 약 200m쯤 떨어진 산 중턱에는 이조정종(李朝正宗)때 공조(工曹), 형 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조정만(趙正萬)의 산소와 그 아들 산소가 있다.
그 묘역(墓域)밖에 풀이 우거지고 칡넝쿨이 무성하게 덮인 한 작은 산소가 있다. 그 산소의 비석(碑石) 전면(前面)에는 열녀(烈女) 나주임씨지묘(羅州林氏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열녀(烈女) 나주임 씨지묘(羅州林氏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열녀(烈女)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나 오랜 풍 상을 지나면서 마멸되어 읽을 수 없다. 조판서(趙判書)는 호걸이어서 정실(正室)이 두명 있 었고 많은 소실(小室)을 거느렸었다.
조판서(趙判書)는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면서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연구하였으며 시 문서예(時文書藝)에 열중하면서 항상 여자를 곁에 두었다. 그는 83세에 20세의 나주임씨(羅州林氏)를 동첩(童妾)으로 맞이하였으나 같이 지낸지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조대감(趙大監)이 죽자 동첩(童妾)인 임씨(林氏)가 가장 슬퍼하였으며 영전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사를 치르고 며칠후에 그 동첩(童妾)은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뜻을 품고 스스로 자결(自決)하였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동첩열녀(童妾烈女)라 일컬어 칭송하였고 정종 (正宗)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려(烈女旌閭)를 내리셨다.
여무실(女舞室)의 유래(由來)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도림동(桃林洞)의 한 마을 이름이 여무실(女舞室)이다. 이 여무실(女舞室)은 옛날에 무당촌 (巫當村)이었다고 한다. 여무실(女舞室)이란 여자(女子)가 춤을 추는 집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이 마을에는 큰집을 지어 놓고 처녀를 뽑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妓生) 또는 무 당(巫堂)을 양성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무당(巫堂)이 굿하고 춤추는 집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인천(仁川)에는 여자(女子)가 붙은 마을이 두곳 있는데 하나는 여무실(女舞室)이고 또 하나 는 연희동(連喜洞)이다. 연희동(連喜洞)은 원래 여신동(女娠洞)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때 여 자(女字)와 선자(船字)는 불길(不吉)하고 천(賤)하다고 하여 여자(女字)를 다른 자(字)로 고 쳐 사용한 것이라 전한다.
<고증인(考證人) : 수산동(壽山洞) 송길용옹(宋吉用翁)>
발산리(鉢山里)의 세 부자(富者)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수산동)
옛날에는 수산동(壽山洞)을 발산리(鉢山里)라고 불렀는데 이 마을에 부자(富者)가 세집 있었 다고 한다. 그들 세 부자(富者)는 오륙백 석의 벼를 추수하는 부자로서 서로 더 부자가 되려 고 시샘을 하였다고 한다. 그 부자들은 서로 자랑을 하기 위하여 노적가리(野積場)를 높이 쌓았다고 한다.
이들은 쌓은 노적가리의 높이가 어찌나 높았던지 서로의 집을 넘겨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 부자(富者)는 어느 때 살았었는지 또 성(姓)이 무엇인지조차도 전하지 않는다.
<고증인(考證人) : 수산동(壽山洞) 송길용옹(宋吉用翁)>
용천(龍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범아가리 대부도(大阜島)의 개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논현동(論峴洞) 호구포(虎口浦)를 범아가리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호구포(虎口浦)에 있는 오봉산(五峰山의 기슭에 커다랗고 검은 바위가 마치 큰 범이 입을 벌리고 으르렁대는 형상이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호구암(虎口岩)은 바다 건너 대부도(大阜島)를 집어 삼킬 듯이 응 시하고 있어 대부도(大阜島)에는 개가 번식이 안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개는 호 랑이의 밥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도(大阜島) 사람들은 개를 사다 놓으면 금방 죽어 버리기 때문에 호구암(虎口岩)을 몹시 싫어하였는데 호구암(虎口岩)이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염전(鹽田)을 만들 때 매몰된 후로는 대부도(大阜島)에 개가 잘 자란다고 한다.
<고증인(考證人) : 논현동(論峴洞) 吳在文翁>
뱀으로 망해버린 주안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경인국도(京仁國道)로 서울을 향(向)해 가다가 원통이 고개에 이르면 우편(右便) 주안산(朱雁山) 기슭에 약사암(藥師庵)이라는 절이 있다. 이 약사암은 최근(最近)에 창건(創建)한 절이 지만 이 곳에서 산정(山頂)을 향(向)해 올라가면 일대(一帶)에 주안사(朱雁寺)의 사지(寺址) 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구(卷九) 불자조(佛字條)를 보면 「주안사(朱雁寺 재주안산(在朱雁山)」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 주안사(朱雁寺)의 창건(創建)연대는 확 실(確實)치 못하나 사지(寺址)에서 채집(採集)된 자기편(磁器片) 等(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 려말기(高麗末期)가 아닌가 추측(推測)하고 있다.
이 주안사(朱雁寺)는 약(約) 150년전(年前) 까지도 법당(法堂)의 건물(建物)이 남아 있었는데 당시(當時)의 주지(住持)가 선행(善行)을 하지 않고 간악(奸惡)한 행위(行爲)만 하였기 때문에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떼뱀이 나타나서 이 절을 망(亡)쳐 놓았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요승(妖僧)이 나와서 주안산(朱雁山) 줄기의 산기(山氣)를 죽이는 부적을 붙였다는 「부적바위」가 있다.
지경소리처럼 속인 만세(萬歲)소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만수동)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는 인천(仁川)에서도 벌어졌다. 인천읍내(仁川邑內), 관교동(官校洞), 간석동(間石洞), 만수동(萬壽洞) 등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사람들이 왜경(倭警) 에게 체포되었다. 주안(朱安)에서는 밤에 봉화(烽火)를 올리고 만세를 불러 왜경에게 체포 된 사람은 없었다.
1 주안동(朱安洞) 송내(松內)마을 사람들이 또 다시 만세를 부르려 하자 왜경들이 긴장하여 경계하였다.
하는수 없어 마을사람들은 편법을 쓰기로 하고 커다란 지 경돌에 팔방으로 새끼줄을 매어 이돌을 높이 올렸다 떨어뜨리며 집터를 닦았다. 지경돌을 높이 올렸다 떨어뜨릴 때 마다 "에이에라 지경이요, 대한독립만세"하고 지경소리와 만세 소리를 함께 지르니 멀리서 들으면 집터닦는 소리로 들려 무사히 만세를 불렸다고 한다.
<고증인(考證人) : 구연계옹(具然契翁)>
서창(西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옛날에는 농지세를 현물세인 벼나 콩·잡곡등으로 징수하였는데 조선중엽에 인천 남촌면과 조동면 마을 사람들은 추수후에 나라에 내는 현물세와 봄부터 대여받은 장리벼의 원리를 합쳐 농가당 약 15섬씩이나 되는 벼를 20여리나 떨어진 북창이나 동창에 갖다내야 했다.
그런데 길이 좁아 우마차가 제대로 다닐 수 없었으므로 현물세를 내러가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이 때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서창이 설치된 것이다. 그 후 서창은 한양으로 가는 관문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당시 전국에는 10개소의 조창이 있어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세곡을 보관하였고 조창에 보관한 세곡은 정부의 수급계획에 의하여 한양으로 운반하였는데 전라·충청 지방의 공세관창(貢稅串倉)[아산(牙山)], 덕성창(德成倉)[익산(益山)], 법성포창(法聖浦倉)[영광(靈光)], 영산창(榮山倉)[나주(羅州)]등 4개소에서 보관한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용산창(龍山倉)과 함께 야적장으로 큰역할을 하였다.
인천시(仁川市) 시청(市廳)터 정각(正閣)골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의 새 청사(廳舍)가 세워진 곳이 정각(正閣)골이다. 새 시청소재지 (市廳所在地) 구월동(九月洞)은 원래 귀월동(龜月洞)이었다. 소췌산(蘇萃山)의 주안봉(朱雁峯)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한 구릉(丘陵)을 이루었는데 그 형태가 마치 거북이 귀(龜)와 같 다고 하여 귀산(龜山)이라 불렀다.
또 이 산이 마치 활처럼 휘어져 반월(半月)같다고 하여 귀산(龜山)의 귀자(龜字)와 반월(半月)의 월자(月字)를 따서 이 마을을 귀월(龜月)이라 부 른 것인데 사람들이 구월(九月)로 잘못 쓰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산의 언덕이 진흙땅이라 서 주원(朱原) 즉 붉은 언덕이라 불렀다. 옛날에는 부청(府廳), 도청(道廳) 등을 가리켜 감영(監營)이라하여 명당(名堂)을 골라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인천(仁川)이 직할시(直轄市)로 승격되어 시청사(市廳舍)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자리잡았다고 생각 하였는데 그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알고 나서는 납득이 갔다. 정각(正閣)골이란 바른 집, 큰집을 뜻하는 것으로 옛날부터 이 곳에 시(市)의 감영 (監營)이 생길 것을 미리 예고한 이름이라 하겠다.
<고증인(考證人) : 공택(孔順澤)외2개>
安垈坪(간석동) 다리에서의 전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1593년 1월 평양전투에서 명나라 원병인 이여송과의 싸움에서 패전한 왜군 소서행장은 평양에서 철수하여 남하하였다. 그들이 남하할 때 한강에 다다르자 일시에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도강 장소를 두 군데로 나누어 도강하였다.
소서행장의 주부대는 임진강을 건너 한성으로 입성하였으며 일부 부대는 한강 하류에서 김포로 건너왔다. 이 때 한강하류로 도강한 왜군은 약 2만명이었는 데 그들이 통진부를 점령하고 이어 김포를 점령한 뒤 부평으로 향하자 부평부사 김시회는 무서워 벌벌 떨다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왜군이 부평을 점령하고 말았다.
부평부사 김시회는 백성들의 비난을 받고 피신해 있다가 나라에서 책임을 추궁하니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왜군은 부평고성을 수리하여 그 곳에 주거하면서 부군의 고을 들을 노략질 하였다. 1593년 1월말 부평에 주둔하던 왜군이 인천에 침입하니 인천부사 김민선이 문학산고성을 지키며 적과 대항하였다.
왜군은 인천군을 얕잡아 보고 싸우다가 참패 를 당하였다. 그 싸움터는 安垈坪(간석동)다리였는데 그 이름을 왜산교(왜군이 흩어 진 다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참패한 왜군은 대군을 몰고 다시 침입 하였는데 인 천부사김민선은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성을 지켰다. 산성을 점령하지 못한 왜군은 외곽에서 노략질을 일삼다가 4월 18일 철수 하였다
<참고문헌 : 임진난사, 쇄미록, 인물약전, 구전>
오닭이의 곧은 딸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지금의 구월동(九月洞)에 "오닭이"란 곳이 있다. 이 곳은 옛날 인천도호부가 있던 문학동에서 서울로 가던 길목이요 여관이 있던 곳이다. 그러므로 옛날엔 언제나 나그네들이 들 끓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주막을 내고 있던 맹(孟)가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하여 힘이세고, 몸집이 거대하여 모두들 맹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사람은 겉으로는 주막주인 행세를 했지만, 실은 도둑질이 그 본업이었다. 자기집에 묵고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교묘한 수단을 써서 도둑질을 해 떠나기 전에 자기가 미리 먼저 나가 그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그것들을 모두 빼앗았다. 나그네중에 돈을 가졌거나, 귀한 물품을 가진 눈치만 보이면, 영락없이 빼앗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그의 주막경영은 그런 돈 있는 사람과, 귀한물품을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위장술이었다. 그런데 이 맹장군은 나그네의 돈이나 귀한 물품을 빼앗는 방법이 참으로 절묘했다. 그는 매일밤 자정이 넘으면 밖으로 나가서, 두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가볍게 치며, 닭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가짜 닭우는 소리를 진짜 닭소리인줄로 만 알고, 잠을 깬 손님들은 소스라쳐 일어나 길을 떠나곤 했다. 손님들은 대개 첫 새벽부터 길을 떠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손님들이 허둥지둥 길 떠날 차비를 서두르면 맹장군은 앞질러 집을 나가는 도중에서 그들을 기다렸다가, 돈과 물품을 빼었었다.
어둠속에서 불쑥 튀어 나온 도둑에 기겁을 한데다가, 그 도둑인 맹장군이 워낙 장사라, 손님들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어쩌다가 손님중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하면, 맹장군은 그 억센 힘으로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이런 소문이 퍼져서 마침내는 관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관가에서도 맹장군의 소행이 고약했으나,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워낙 흉악한 맹장군이라 어떤 후환이 생길까 그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이 맹가에게는 훌륭하고 영리한 며느리 하나가 있었다. 구월동에 사는 오대라는 사람의 딸이었다. 이 며느리는 시아버지인 맹장군의 못된 행실을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어 잘 알고 있었다.
창피스러워서 도무지 얼굴을 들고 바깥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며느리는 어떻게 하면 시 아버지의 이 못된 행실을 고칠 수 있을까 하고 골똘히 그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며느리의 머리속에 꾀 하나가 떠올랐다.
시아버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그리고 손님들이 닭 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줄도 모르고 맹장군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어느날 밤, 자정에 또 닭우는 소리를 흉내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의 며느리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닭아 닭아 우지마라" 맹장군의 인(人) 닭이다."
이 노랫소리를 듣자 놀란 것은 맹장군만이 아니었다. 잠을 깨어 막 길을 떠나려던 손님들도 이 노랫소리를 듣자 맹장군의 의문스러운 소행을 눈치채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는 후로는 그렇게도 간악했던 맹장군도 여태까지의 자기소행을 깊이 뉘우치고 도둑질을 안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이 소문은 관가에까지 알려져서 그 며느리에겐 상이 내려졌단다. 그런데 "오닭"은 며느리의 아버지 이름이 "오대"에서 온 듯 전해지고 있다.
장사 박창보(朴昌輔)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구한말 고종때의 일이다. 간석동(間石洞)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으나 힘이센 장사였으며 담도 컸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샛골」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때 간석동 일대에는 소문난 무서운 도적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가에서 설령 이 도적을 잡아도 감히 처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 도적의 졸개들이 보복을 할까 두려워서 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날이었다. 그 도둑을 체포하여 목을 베기로 작정하였으나 관가에 서는 후환이 두려워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백성을 다스려야 할 관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곤경에 처해 있었을 때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박창보가 자진해서 그 도둑을 처형하겠노라고 관가에 나갔다. 박창보가 장사인데다가 자진해 나왔으므로 관가로서 는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리하여 박창보는 마침내 그 도둑괴수의 목을 잘랐다. 그러나 괴수가 처형을 당하자,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밤에 도둑의 졸개들이 떼를 지 어서 박창보네 집으로 쳐들어왔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박창보네 집안 사람들은 간이 콩알만 해져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제 영락없이 도둑의 졸개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박창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실로 놀랄만한 용한 꾀 하나를 생각해 냈다. 이리하여 박창보는 자기 부인의 옷을 달래서 여인으로 변장을 했다. 그 리고는 쇠도리깨를 가지고 도둑의 졸개들을 닥치는대로 마구 쳤다.
장사의 억센 힘으로 치는 쇠도리깨를 맞고 어느 누가 견디겠는가? 삽시간에 몇 놈이 땅 바닥에 쓰러졌다. "에이 이놈의 집은 여편네까지 동삼을 삶아 먹었는 지 모두 장사로구나 그대로 싸웠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는걸" 이렇게 투덜대며 생명을 보존 한 놈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 싸움에 도리깨를 맞아 당하자 나동그라 진 도둑이 열명도 더 되었다.
이런변을 당하자 도둑들도 겁을 먹고 그 후 다시는 쳐들어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임오군란때의 일이다. 일본인 하나부사(化義 )가 문학동으로 피난을 가던때였다. 그 때 「장자골」에 살던 최춘택(崔春澤)이란 사람이 왜병들의 총을 열 다섯 자루나 빼앗아 한 아름에 안고 간일이 있었다.
분노에 찬 왜병들이 이를 갈며 그 최춘택을 쫓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우리의 장사 박창보의 의협심이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비호같이 날 아 지붕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단단한 기왓장을 걷어서 왜병들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이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자, 왜병들은 기겁을 하고는 그 이상 최춘택을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고 한다.
삼각산 이장사(三角山 李壯士) (위치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 담뱅이 마을)
조선(朝鮮) 고종시대(高宗時代)에 만수동(萬壽洞) 담뱅이 마을에서 장사(壯士) 났었다고 한다. 전주(全州) 이씨(李氏)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나이 10살도 되지 않아서 어른이 되었고 15살 되었을 때에는 그를 당해낼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이 세서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하 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삼각산 이장사(三角山 李壯士)라고 불렀다.
이장사(李壯士)는 20살 때 한양으 로 올라가 그의 힘을 자랑하여 한양(漢陽)에서 계속 힘을쓰고 방랑하다가는 큰 일이 날 것 같아 그의 부모들은 그를 인천(仁川)으로 불러 내렸다. 이장사(李壯士)를 집에 근신시키니 힘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발광을 하였다.
그의 부모는 더욱 불안을 느껴 마침내는 사람을 시켜 이장사(李壯士)의 어깨를 자귀(木工器具)로 찍어 반신불구로 만들고 말았다. 삼각산 이장사(三角山 李壯士)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까닭에 병신이 되어 불행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무당 열녀(巫堂 烈女) (위치 :인천광역시 남동구 수산동)
옛날부터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는 명문양반(名門兩班) 집안에서만 난다고 하였 는데 인천(仁川)에서는 천한 무당집에서도 열녀(烈女)가 나왔다. 인천(仁川)에는 대표적인 재인촌(才人村)이 세군데 있었는데 첫째는 전재리(全才里)구월동(九月洞)이고 둘째는 운연리 (雲宴里)수산동(壽山洞)였다.
전재리(全才里)란 전부재인(全部才人)이란 뜻으로 이 마을에 사 는 광대들 중 줄타는 재주꾼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연락동(宴樂洞)이란 연회(宴會)를 열어 즐겁게 논다는 뜻으로 이 마을이 무촌(巫村)으로 굿 만하고 즐겁게 노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경신리(慶信里)는 경신리(慶神里)의 오기(誤記)인데 공경한다는 뜻으로 신(神)을 믿는 무당 을 일컫는다. 이 경신리(慶神里) 무당촌에서 무당열녀(巫堂烈女)가 났다. 옛날에 그 부인은 무당(巫堂)으로 이름을 날려 돈을 잘 벌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50대 이르러 병 이 들었는데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굿을 하여 정성을 드렸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병(病)에는 사람의 고기를 먹이면 낫는다는 얘기가 있어 그부인은 자기의 허 벅지 살을 베어 남편에게 먹였다.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남편의 병이 약간의 차도가 있다가 수개월이 지나자 또 다시 병이 심해져 그만 죽고 말았다. 아내는 크게 애통해 하며 침식을 잊었다. 이러한 사실은 온 인천(仁川)에 퍼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인천(仁川)의 유학자들은 철종(哲宗)께 이 사실을 상소하였다. 철종(哲宗)은 무당의 행적을 극구 칭찬하고 열녀문(烈女門)을 내렸다.
안기현(安基鉉)의 도술(道術)과 태권(跆券)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조선(朝鮮) 고종(高宗)때 인천(仁川)의 간석동(間石洞)에 안기현(安基鉉)이란 사람이 살았는 데 그는 일찍이 절(寺)에 가서 공부하여 학식이 높았고 도술(道術)도 잘부렸으며 태권도(跆拳道)도 잘 하였다. 간석동(間石洞)은 경인(京仁)도로 변이라서 유달리 도둑이 많았다.
도둑들은 지나는 행인 (行人)을 털거나 민가(民家)에 총을 가지고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여 그 피해가 컸다. 안기현(安基鉉)은 부하(部下)들을 데리고 산 속에 숨어 도둑떼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습격하 여 태권도(跆拳道)로 모조리 잡아 없앴다. 한번은 그의 손자(孫子)가 독사에 물려 퉁퉁 부어 죽게 되었었다.
온식구가 당황하며 떨고 있을 때 마침 안기현(安基鉉)이 외출에서 돌아와 상에 냉수를 떠 놓고 앉아 주문을 한참 왼 후 휘파람을 휙휙 부니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났 다. 그독사를 죽이고 또 다시 주문을 외우니 손자(孫子)의 몸에서 독기가 빠져 나갔다고 한다. <考證人 : 間石洞 安種國翁>
부녀자(婦女子)가 바람나게 하는 산혈(山穴)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논현동(論峴洞)과 고잔동(古殘洞)은 가까운 이웃마을로 두 마을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도림동(桃林洞)과 오봉산(五峰山) 줄기가 길게 뻗어 내려 논현동(論峴洞)을 지나 해변가로 내려가 고잔동(古殘洞)에 멈추고 있다.
옛날부터 논현동(論峴洞)의 산혈(山穴)을 헐면 고잔동(古殘洞)의 부녀자가 놀아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래서 고잔동(古殘洞) 주민들은 혹시 논현동(論峴洞)에서 산혈 (山穴)을 파내지 않아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며 논현동(論峴洞) 처녀들은 자꾸 산 (山)을 파내어 장난을 쳤다고 한다.
<고증인(考證人) : 수산동(壽山洞) 송길용옹(宋吉用翁)>
동방천(東方川)의 황금(黃金)단지 (위치 : 인천직할시 남동구 논현동)
동방천(東方川)은 소췌산(蘇萃山)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흘러내려서 서해(西海)로 합류(合流)하는 하천(河川)으로 뱀내(蛇川)를 가리킨다. 옛날에 충청도(忠淸道) 지방의 어느 선비가 소췌산(蘇萃山) 밑을 지나다가 동방천(東方川) 상류(上流)에 있는데 개울 바닥에 항아리가 하나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그네가 그 항아 리를 뒤져보니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그네는 한꺼번에 그 황금(黃金)을 모두 가져갈 수가 없어서 일부분만을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하천(河川) 바닥에 묻고 나무로 표시로 하였다.
며칠 후에 그 나그네는 말을 타고 다시 그 자리에 가서 표시해 두었던 곳을 찾아 보았으나 내 바닥이 변하였고 표시해 두었던 나무도 간 곳이 없었다.
나그네는 황금(黃金) 단지를 찾 으려고 무척 노력하였으나 허사로 끝나고 말아 자신은 부자(富者)될 팔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단념하였다. 아직도 노인들은 황금단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하천(河川) 어딘가에 항아리가 있거나 혹 은 어떤 사람이 횡재를 하였거나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증인(考證人) : 소췌읍(蘇萃邑) 은행리(銀杏里) 노인>
호구포(虎口浦)의 전설(傳說)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논현동(論峴洞)은 옛날에 사신(使臣)들이 외국(外國)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야 기 하며 넘는 고개라 하여 논현동(論峴洞)이라 불렀다. 그 논현동(論峴洞) 근처 호구포(虎口浦)를 속칭「범아가리」라 부르는데 그 지명(地名)의 유래는 호구포(虎口浦) 뒷산의 오봉산 (五峰山) 기슭에 있는 바위는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다른 돌과는 달리 색다른 바위라서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실어다 놓았으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돌을 어떻게 실어 왔을까 의문스럽다. 마을 사람들은 호구(虎口) 모양을 한 그 바위를 마을 수호신(守護神)처럼 여겼었다고 한다.
호구포(虎口浦)는 인천(仁川)의 최남단인데 들을 건너면 남쪽이 안산(安山) 이다.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호구암(虎口岩)은 안산(安山)에 있는 산(山)과 마주 대하고 있다. 그런데 안산(安山)에 있는 산(山)에는 세도가(勢道家)의 산소가 여럿 있는데 무슨 까닭 인지는 몰라도 그 산소의 자손들이 드물어 대(代)를 잇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에 대하여 어떤 지관(地官)이 건너편에 있는 호구암(虎口岩)이 이 산소를 향하여 커다란 입을 벌리고 그 산소를 삼키려 하는 격이라 자손이 드물다고 하였다. 그 산소의 자손 들은 성묘할 때 마다 어떻게 하면 그 호구암(虎口岩)을 없앨 수 있나 궁리를 하였는데 그 호구암(虎口岩)이 워낙 컸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기는 힘들겠고 산소를 향한 호구(虎口)를 떼어 버리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 범의 턱을 도끼로 때려 없앴다.
그후부터는 자손들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 호구암(虎口岩)은 약 50년(年) 전에 염전(鹽田) 을 만들 때 매몰되어 영영 없어지고 말았는데 호구포(虎口浦) 사람들은 그들의 수호신(守護神)이 사라진 것을 서운해 하였지만 건너편 산(山)의 산소 주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 고증인(考證人) : 논현동(論峴洞) 崔忠博翁>
원통이 고개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이 고개는 예로부터 인천서 부평을 거쳐 서울로 가는 요로였으나 숲이 우거지고 도둑 떼가 많이 출몰하여 숱한 전설이 남아있다.
1) 수로(水路) 못내 「원통하다」에서
옛날에는 농민들이 조세를 납부하기 편리하고 서울로 반출하기에 편리한 곳에 조창(漕倉)을 지어 놓고 현물세를 수납하였는데 조창( 倉)이 한 도(道)에 한 두 개에 불과하여 먼 곳에 사는 농민들은 아주 불편하였다.
각 지방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稅穀)은 나라에서 지정하는 기일 내에 국고(國庫)에 납부해야 하는데 만약 기일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하였으므로 각 고을 군수(郡守)들은 세곡(稅穀)을 미리 서울 근방에 야적(野積)하였다가 납부하였다.
그러나 야적장(野積場)에 적재하였다가 반출하는데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다. 풍랑(風浪) 사고, 해적의 약탈, 조선(漕船)을 운영하는 선원 및 호송관리들의 착취등으로 그 피해가 많았다. 특히 손돌목에서는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큰 골칫거리였다. 사고대책 마련에 부심한 나머지 경인운하(京人運河)를 파기 시작하였다.
경인운하(京人運河)의 시굴(試掘)
(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시굴(試掘)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이(崔怡)는 인종(人宗) 16년(1137年) 김포 (金浦) 굴포천(掘浦川)을 한강(漢江)과 연락하는 수로(水路)로 개척하여 한강(漢江)물을 서해 (西海)로 돌리려다가 계양산맥(桂陽山脈) 원통현(圓通峴)의 암벽을 뚫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 았다.
(나)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시도(試圖)
조선시대(朝鮮時代) 강화해협(江華海峽) 손돌목에서 조선(漕船)의 사고가 잦아 피해가 컸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對策)을 논의한 결과 중종말(中宗末)(1440年경) 김안노(金安老)가 부평(富平)에 내려와 경인운하(京仁運河)를 시굴(試掘)하였다. 김안노(金安老)의 운하계획(運河計劃)은 한 강(漢江)물을 굴포천(掘浦川)을 통해 인천(仁川) 앞바다에 연결 시키려는 것이었다.
(다) 제1차(第一次) 운하시도(運河試圖) - 원통현(圓通峴)
김안노(金安老)는 굴포천(掘浦川)을 깊이 파서 부평평야(富平平野)를 횡단하여 부평(富平)의 대정리(大井里)까지 시굴(試掘)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는데 계양산맥(桂陽山脈)의 원통현(圓通峴)의 암벽을 관통하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라) 제2차(第二次) 운하시도(運河試圖) - 수월리(水越里)
계양산(桂陽山) 원통현(圓通峴)의 암벽(岩壁)을 뚫지 못하여 실패한 김안노(金安老)는 다시 남동지구(南東地區) 장수동(長壽洞) 소재(所在) 소래산맥(蘇萊山脈) 수월현(水越峴)으로 방향 을 돌려 인천(仁川) 장수천(長壽川)을 깊이 파서 경인운하(京仁運河)를 시도(試圖)하였으나 이번에는 수월현(水越峴)의 암벽을 뚫지 못하여 실패했다.
(마) 제3차(第三次) 시도(試圖) - 안하지 고개
김안노(金安老)는 운하시굴이 거듭 실패하자 이번에는 굴포천(掘浦川)에서 청천천(淸川川)과 연결시켜 수로(水路)를 깊이 파고 안하지고개로 하여 주정천(住亭川)으로부터 서해(西海) 로 운하(運河)를 뚫으려 하였으나 철마산맥(鐵馬山脈) 암벽을 뚫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결국 운하를 파지 못하여 원통하다고 하여 원통현(怨通峴)이라 하였던 것이 원통현(圓通峴) 으로 변하였고, 물을 넘기려 하였다고 해서 수월(水越)이란 지명(地名)이 생겼고, 안하지란 내하지(內河地)로 하천(河川)으로 깊이 파서 고개 안쪽에 하지(河地)를 팠으므로 안하지고개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적산(元積山)으로 이 산 남북(南北)으로 운하를 팠으나 모 두 실패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2) 한 골짜기 모자라「원통하다」에서
이조 초, 새로 건국한 이성계는 새 도읍지를 정하려고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그 후보지를 두루 찾아 보게 했다. 이리하여 무학대사가 한양 계룡산을 거쳐 이 곳 부평에 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무학대사 가 부평 땅에 이르니, 들이 넓고 기름지며 멀리 한양까지 끼고 있으므로 나라의 도읍지가 될만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 곳 골짜기를 세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나라의 도읍지가 되자면 그 곳 골짜기가 백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골짜기를 세던 대사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닦고 아무리 세어 보아도 골짜기 수는 아흔 아홉 개 밖에 되지 않았다. "아,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한 골짜기가 모자라는구나". 대사는 원통하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되뇌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애석하게 여기며 한 숨을 짓던 곳이 바로 이 고개였으므로 그 뒤부터 「원통이 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3) 언덕으로 바뀌어「원통하다」에서
도읍지를 구하러 무학대사가 함께 이 곳으로 온 이성계(李成桂)가 부평 땅의 골짜기를 세어 보니 100개의 골짜기였다. 그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래서 이성계는 주안산(朱雁山)에 있던 주안사(朱雁寺)로 무학대사를 보내어서 산신께 제사를 지내도록 당부하고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이성계가 다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을 거느리고 이 곳으로 와서 골짜기를 세어 보니 이상하게도 이 봉우리가 얕은 언덕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 원통한지고! 원통한지고!, 이 봉우리가 언덕으로 바뀌다니!" 이리하여 이 고개가 「원통이 고개」로 불리게 되었으며 부평이 이씨 조선의 도읍지가 되지 못했단다.
구리안반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인천(仁川) 무넘이 (현 남동구(南東區) 장수동(長壽洞 수월(水越)마을) 에 부자(富者)가 살았었는데 그 집에서는 매일 떡을 해 먹어서 떡치는 안반을 통나무로 만 들면 얼마 못가서 부서지므로 영구히 사용하려고 구리로 안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구리 안반은 귀한 재물로 그 집에서 무척 소중히 여겼었는데 뜻하지 않았던 사변(事變)이 일어나 급히 피난을 가면서 이 구리안반을 집안 연못에 묻고 떠났다. 난리가 끝난 뒤 식구들이 집에 돌아와서 연못속에 묻었던 구리안반을 찾았으나 간곳이 없었다.
그 구리안반을 묻었던 연못은 그 곳에 아직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 은 그 때 도난당한 것이라 없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考證人: 장수동(長壽洞 老人들>
옛날 경인간(京仁間)의 육도 경신역지(慶信驛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수산동 경신부락)
인천은 옛날부터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 군사상으로나 교통상으로 중요시 하였던 곳으로 경인철도 및 산업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경인간의 약 80리나 되는 원거리를 대부분 걸어다녔으며 길이 좋지 않아 10시간 이상씩 걸렸다. 공무를 띤 관리들은 역마(경신역에서 관용역마를 태워 주었음)를 이용하였고 고관대작들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다녔다. 물자는 우마차를 이용하거나 인부가 등에 지고 운반하였다. 당시 경인간의 육로는 다음과 같다.
영종포(永宗浦) → 제물포(濟物浦) → 인천읍(仁川邑)[관교동(官校洞)] → 경신역(慶信驛)[수산동(壽山洞) 慶信 마을] → 성현(星峴)[만수동(萬壽洞 비루고개] → 동소정(同所井)[부평동(富平洞) → 역곡(驛谷)[富川市 역곡동] → 오류원(梧柳院)[서울 오류동] → 영등포(永登浦) → 양화도(梁花渡)[한강나루] → 마포(麻浦) 또는 용산(龍山) → 한양(漢陽)
경신역지(慶信驛祉)
위 치(位置) : 수산동 경신부락 도로변(壽山洞 慶信部落 道路邊)
설치연대(設置年代) : 고려시대(高麗時代)
폐지연대(廢止年度) : 1896년 건양원년(建陽元年) 1월
설치목적(設置目的) : 옛날의 역(驛)이다. 한양(漢陽)에서 인천(仁川)으로 통하는 길목에 설치한 행인(行人)의 유숙소(留宿所)였다. 역(驛)에는 역사(驛使)를 두고 역마(驛馬)를 두어 태워 주었다.
장수(長壽)하는 지방(地方) 인천(仁川)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 )
옛날부터 인천(仁川)은 장수(長壽)하는 지방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인천관내(仁川管內)에는 장수(長壽)를 뜻하는 수자(壽字)와 학자(鶴字)가 붙은 지명이 많다. 수자(壽字)가 붙은 지명(地名)은 네군데로 연수동(延壽洞), 만수동(萬壽洞), 장수동(長壽洞), 수산동(壽山洞)등이고, 학자(鶴字)가 붙은 지명(地名)은 송학동(松鶴洞), 문학동(文鶴洞), 청학동(靑鶴洞), 선학동(仙鶴洞), 학익동(鶴翼洞) 등 다섯 군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현종(顯宗)원년(1660년)에 「길주유세노인(吉州有歲老人) 199세(歲) 인천영평역유백세노인(仁川永平亦有百歲老人)」이란 기록(記錄)이 나온다. 길주(吉州)에는 199세나 되는 노인이 살고 있고 인천(仁川)과 영평(永平)에는 백세노인(百歲老人)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수(長壽)하는 마을의 뒷 산을 만수산(萬壽山)이 라 부르게 된 것이며 만수동(萬壽洞)이란 동명(洞名)도 또한 이에 기인된 것이다.
<고증인(考證人) : 연수동 고이원옥옹(延壽洞 故李元玉翁)>
기미년의 태풍(颱風) 참변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
소래포구하면 갯마을임을 뜻하는 이름이고 어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갯마을에는 옛날부터 서해연안 어항(漁港)으로 중선(원양어선)이 12척이 나있었다고 한다. 중선이란 보통어선이 아니고 대형어선으로 한 배에 종사하는 뱃동사(선원)가 30명 정도나 승선 조업하게 되니 이 마을에는 어부가 3,4백명이되는 큰 어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포구에는 농경지가 많아 농어민이 같이 살았고, 비교적 부유한 마을이었다. 기미년(1919년) 윤 7월 우리나라 서해안을 강타한 아주 큰 태풍이 있었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가하였던지 포구에 매 놓은 배가
모조리 바람에 부서지고 항해하던 배는 불시의 돌풍으로 피할 여지없이 침몰되고 말았다.
그 때 포구에 선적을둔 배는 모조리 부서지고 말았는데 정박중인 배에는 사람이 미리 내려서 인명피해는 없었는데, 입항중인 배 수척이 전복되어 20여명이 물에 빠져 죽고말았다.이런 사고는 전무후무한 큰 사고였다. 죽은 장정어부의 3분의 2이상이 기혼남자로 한꺼번에 청춘과부가 생겨 한마을에 제삿날이 20집이다.
태풍이 멈춘 뒤에는 시체를 찾느라 모진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70년이 된 오늘날에도 이 곳 노인들은 그 옛날의 참사를 회고하며 큰 사고였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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