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근해 갯가노래.뱃노래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인천 근해에는 크고 작은 섬이 많을 뿐 아니라 서울의 한강하류와 인접해 있어 인구도 많고 그에 따른 노래도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갯가노래와 뱃노래이다. 갯가노래는 어렵고 고된 생활을 하소연하는 여인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고, 뱃노래는 어부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다.
갯가노래에는 물장구 장단의 나나니타령과 조개를 캘 때 부르는 군음이 있다. 뱃노래는 노동의 양상에 따라 다른 노래가 불러진다. 항해를 위해 닻을 감아 올릴 때 부르는 닻감는 소리, 노젓는 소리, 그물에 담긴 고기를 배에 옮겨 실을 때 부르는 바디소리, 어획기를 맞아 시선배가 어선으로부터 고기를 매입하여 육지로 운반하면서 부르는 시선뱃노래, 풍어를 기원하거나 만선 귀향을 축하하는 뜻으로 부르는 배치기 등이 있다.
인천 근해의 갯가노래, 뱃노래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동요 중에서 대표적인 노래이다. 인천에 사는 차영녀씨 등 5명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주대소리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
주대소리는 노동요로서 어부들이 바다에서 사용하는 닻줄을 만들 때 불려지던 노래이다. 내용은 나무타령·자우소리·줄 놓는 소리·꼼새소리·순레소리·채짓는 소리·여사소리·사리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타령은 나무를 벨 때 부르는 소리, 자우소리는 줄을 단단하게 꼴 때 부르는 소리이다. 줄 놓는 소리는 굵지 않은 세 가닥의 줄을 꼬아나갈 때, 꼼새 소리는 줄이 단단하고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른다.
순레소리, 채짓는 소리는 가는 3개의 줄을 하나의 굵은 줄로 만들 때 부르며, 굵게 꼬여진 줄을 둘둘말 때 여사소리, 사리소리 등을 부른다.
김재로
김재로(1682 숙종8년-1759 영조 35년)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이며 우의정 구(構)의 중자(仲子)로 태어났다.
1702년(숙종28) 진사(進仕)가 되고,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을과로 급제하여 겸설서·검열·지평·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16년 부수찬으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희·정식(鄭植)등을 탄핵하여 파직하게하였다.
1718년 헌납·동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대사성·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농민층의 토지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관직에 나간이 후 부재학, 우의정, 좌의정 등 내외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특히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실록도청 당상을 견직하여 [경종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판충추부사 때에는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서 [명사]를 가져 오기도 하였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 석구 한 쌍 그리고 장명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곡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때의 모습과 36세때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조정만(趙正萬)
이여발(李汝發)
이승훈의 순교(巡校)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1756년 인천 장수동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우리 나라에선 처음으로 베드로란 본명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조선시대 저명한 실학자인 성호이익의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누이인 부인 등 선구자적인 집안이었다. 천주교인 이벽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하였고, 동지사의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청으로 들어가 1784년 예수회의 루이드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천주교 탄압으로 몇번에 거쳐 체포되면서 배교(교를 배신하는 것)를 되풀이하다 1810년 신유 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아들인 이신규와 손자인 이재의가 그 뒤를 따라 순교하였고, 1871년엔 증손자 이연귀, 이균귀가 각각 순교하여 4대의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이 숙(李 琡)
만수동 출신으로 정용 (正 容)이자 학자 (學 者)인 이숙은 인천지역 문화창달에 기여한 공이 큰자로서 이정직(李 廷直)의 아들이고 자는 지생(遲生)이며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1574년 6월 26일 출생하여 소년시절부터 재주가 있어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성리학 탐구에 열중하였으며 벼슬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는 시교관(侍敎官)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기개가 곧은 자였다.
그 후 인조가 등극하여 추계 김장생(金長生)은 이숙을 천거하여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율곡 이이, 오봉 이호민등 그 당시 정계에 있는 학자들과 교우(交友)하며 지냈다. 그는 고상한 학식으로 인천 송림동 만취당에서 인재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만취당점이 전하며 1628년(인조 6년) 2월 11일 사망하였다. 아직도 인천 송림동에 그가 기거하던 만위당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송국준(宋國準)
이희문(李希文)
김치인(金致仁)
최 윤(崔 奫)
천주교 접장(天主敎 接狀) 민종식(閔種植)의 순교(殉敎)
조선조 고종 말기에 인천 고잔동에 사는 민종식은 재산이 많아 부유하게 생활을 하였는데, 같은 인천사람 이승훈(李承薰)의 감화로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당시 고종 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여기고 이를 탄압하였는데, 병인·신미양요(丙寅·辛未洋擾) 후부터는 천주교인이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때 민종식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천주교를 믿고 있었는데, 어느 누가 이 사실을 관에 밀고하여 그의 부처(夫妻)는 인천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인천부사(仁川府使)는 상부의 명령으로 민종식부처를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 두 사람의 사형 집행장은 조동면 새펄마을(지금의 만수동)에 마련되었다. 당시의 사형 집행 장소에는 인천부사가 입회하였는데, 이를 구경하러 운집한 수 많은 주민들이 눈여겨 보는데서 망나니는 술에 취한 얼굴로 큰 칼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기를 여러번 하고 목을 자르니 선혈이 흐르고 이를 지켜본 고을 사또는 그들의 숨이 끊어짐을 확인하 연후에야 돌아갔으며, 무시무시한 이 광경을 지켜본 군중들은 모두들 흐느끼며 돌아갔다.
그 날 밤에야 불과 17세의 어린소년인 그의 아들 민선훈(閔善勳)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부모의 시신을 운구해 가서 지금의 논현동 호구포 오봉산(五奉山) 선영에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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