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호 |
김재로묘
김재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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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3호) 김재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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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자
199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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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 남동구 운연동 산 6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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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면적
1기, 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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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문화재청(김재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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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 조선 후기의 문신인 청사(淸沙) 김재로(1682∼1759)의 묘소이다. 숙종 28년(170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1710)에는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겸설서(兼說書)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부재학,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등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 특히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실록도청 당상을 견직하여 『경종수정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판중추부사 때에는 청나라에 가서『명사(明史)』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두른 묘와 묘비·망주석·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돌짐승 한 쌍이 있으며, 주위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 때의 모습과 36세 때의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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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434.3㎡) |
남동구 운연동 산 64-13 |
국토교통부
(청풍김씨종중) |
1990.11.9 |
제7호 |
조정만묘
조정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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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7호) 조정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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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자
199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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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 남동구 도림동 산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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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면적
5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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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문화재청(조정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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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조정만(1658∼1739) 선생의 묘소이다.
-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齎)이다. 아버지는 합천군수 경망(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식(寔)의 딸이다.
-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숙종 7년(1681)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한 사건에 대해 성균관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고 이어 공조, 호조의 낭관, 제용감, 군자감의 판관, 장악원정 등을 지냈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는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오재집』이 있다.
- 현재 도림동에 위치한 그의 묘역에는 묘비와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 근처에는 높이 3.5m, 너비 1m의 이의현이 짓고 김진상이 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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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516.9㎡) |
남동구 도림동 산 46-3 |
임천조씨오제공파종중 |
1990.11.9 |
제50호 |
이여발 묘
이여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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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50호) 이여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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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자
198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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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 남동구 운연동 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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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면적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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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문화재청(이여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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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 조선의 무관인 이여발(1621∼1683)의 묘이다.
- 이여발의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정익(貞翼)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의배(義培)의 손자로서 조선 효종 2년(1651) 무과에 급제, 비변랑(備邊郞), 도총사를 거쳐 숙천(肅川)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충청병마절도사를 거쳐 특히 회령(會寧)부사에 보직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는데,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으로서 야인(野人)들과 서로 무역하는 시장이 있어 야인상인들이 오는 정원도 없고 체류하는 기한도 없어서 우리의 피해가 많았다. 이때 이여발이 부임하여 상인의 출입인원을 320명 이내로, 체류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여 피해를 줄였다. 현종 때 병·공조참판에 특진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가 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연습시키는 한편 병기를 준비하여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어영대장, 한성부 좌·우윤을 역임하고 숙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사망하였다.
-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문인석 한 쌍이 세워진 평범한 묘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분묘 앞 10여미터 아래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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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 |
남동구 운연동 343-1 |
한산이씨정익공파종중 |
2002.2.4 |
제62호 |
월성박씨종중묘역
월성박씨종중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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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62호) 월성박씨 종중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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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자
20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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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산29-42외 2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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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면적
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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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문화재청(월성박씨 종중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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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 월성박씨(月城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제8왕자인 월성대군(月城大君)의 자손으로 고려 후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에 크게 융성하였다. 중시조인 박구(朴龜,1337∼1404)는 고려 중군사정부령(中軍司正副令)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이 곳에 칩거하면서 자신을 감춘다하여 호를 ‘장아(藏我)’라 하고 뒷산을 장아산이라 하였다. 장아산(해발 73.6m)서쪽 구릉에 위치한 월성박씨 종중 묘역에는 현재 박구와 그의 후손인 박간(朴幹), 박휘(朴徽), 박신겸(朴信謙),박호겸(朴好謙), 박홍중(朴弘中) 등 11기의 묘가 남아 있다. 그 중 통훈대부 추산(秋山) 박홍중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관직을 물러난 후 장아산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 묘역에 있는 봉분과 묘표, 문인석, 망주석,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교적인 묘제로서 특히 박휘와 박신겸, 박호겸의 묘표는 제작년대가 분명하여 조선 중기의 묘제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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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8㎡ |
남동구 서창동 산29-41외 2필지 |
인천광역시
(월성박씨종중) |
2010.5.3 |
제63호 |
이승훈묘
이승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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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63호) 이승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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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자
201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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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 남동구 장수동 산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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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면적
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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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문화재청(이승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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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이승훈(1756~1801)의 묘이다.
-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 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 이승훈은 1785년 서울 명동의 역관집안 출신인 김범우의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후, 몇 차례의 배교와 복교의 과정을 거치다가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정약조,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 비록 몇 차례 배교했으나 조선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던 이승훈의 유해는 만수동 남동 정수장 뒤편 초곡산에 묻혔으나 1981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 만이 그의 아들 택규, 신규의 묘와 함께 남아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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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0㎡ |
남동구 장수동 산132-1 |
학교법인
인천카톨릭학원 |
2011.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