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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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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에서 관리하고 있는 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62호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와, 시지정문화재(7종)으로 유형문화재 제6호인 “논현포대”를 비롯하여 기념물 5종, 문화재자료1종을 보존관리하고 있다.문화재의 관리는 해빙기, 우기, 동절기 등 년3회 이상 일제점검 및 정비를 실시하고 있으며, 월1회 정기점검 및 각 문화재별로 현지에 거주하는 명예관리인을 선임하여 수시로 관리하고 있다.

총괄

남동구 문화재현황의 총괄을 구분, 총계,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 시지정문화재(구관리)[유형문화재, 기념물, 문화재자료]로 나누어 작성한 표
구분 총계 국가지정문화재 시지정 문화재 시등록 문화재
천연기념물 유형문화재 기념물 문화재자료
남동구 9 1 1 5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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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정 유형문화재

시지정 유형문화재를 지정, 명칭, 수량(규모), 소재지, 소유자(관리주체), 지정일시로 나누어 작성한 표
지정 명칭 수량(규모) 소재지 소유자(관리주체) 지정일시
제6호 논현포대

논현포대

논현포대 사진

  • 명칭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6호) 논현포대

  • 지정일자

    1982.03.02

  • 소재지

    인천 남동구 논현동 648-1

  • 수량, 면적

    포2좌, 1,826㎡

  • 참조

    문화재청(논현포대)

  • 문화재 설명

    - 논현포대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을 겪고 나서 경기 연안의 방어시설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의 명을 받은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가 경기 연안의 군사시설을 확충하면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서양인들의 배를 막기 위해 1879년에 구축한 것이다. 축조당시의 명칭은 호구포대였으난 현재는 논현포대로 부르고 있다. 축조된 후 인근에 설치되어 있던 묘도포대, 제물포대 등과 함께 화도진(花島鎭)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이 포대도 폐쇄된 것으로 추측된다.
    - 이 포대가 원래 몇 개의 포좌(砲座)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현재는 2개의 포좌 만이 남아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논현포대의 축조 형식은 각 포좌의 아랫 부분에 잡석을 깔고 중단과 상단에는 어느 정도 다듬은 장대석을 쌓았으며 그런 다음 그 위에 봉토를 하여 마무리하였다. 또한, 지형 여건상으로 미루어 보아 각 포좌에는 이동식 중포 2문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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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 남동구 논현동 648-1
(논현근린공원) 내
남동구 1982.3.2

시지정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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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명칭 수량(규모) 소재지 소유자(관리주체) 지정일시
제3호 김재로묘

김재로묘

김재로묘 사진

  • 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3호) 김재로묘

  • 지정일자

    1990.11.09

  • 소재지

    인천 남동구 운연동 산 64-13

  • 수량, 면적

    1기, 434.3㎡

  • 참조

    문화재청(김재로묘)

  • 문화재 설명

    - 조선 후기의 문신인 청사(淸沙) 김재로(1682∼1759)의 묘소이다. 숙종 28년(170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1710)에는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겸설서(兼說書)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부재학,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등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 특히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실록도청 당상을 견직하여 『경종수정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판중추부사 때에는 청나라에 가서『명사(明史)』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두른 묘와 묘비·망주석·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돌짐승 한 쌍이 있으며, 주위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 때의 모습과 36세 때의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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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434.3㎡) 남동구 운연동 산 64-13 국토교통부
(청풍김씨종중)
1990.11.9
제7호 조정만묘

조정만묘

조정만묘 사진

  • 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7호) 조정만묘

  • 지정일자

    1990.11.09

  • 소재지

    인천 남동구 도림동 산46-3

  • 수량, 면적

    516.9㎡

  • 참조

    문화재청(조정만묘)

  • 문화재 설명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조정만(1658∼1739) 선생의 묘소이다.
    -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齎)이다. 아버지는 합천군수 경망(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식(寔)의 딸이다.
    -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숙종 7년(1681)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한 사건에 대해 성균관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고 이어 공조, 호조의 낭관, 제용감, 군자감의 판관, 장악원정 등을 지냈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는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오재집』이 있다.
    - 현재 도림동에 위치한 그의 묘역에는 묘비와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 근처에는 높이 3.5m, 너비 1m의 이의현이 짓고 김진상이 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닫기

1기(516.9㎡) 남동구 도림동 산 46-3 임천조씨오제공파종중 1990.11.9
제50호 이여발 묘

이여발 묘

이여발 묘 사진

  • 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50호) 이여발묘

  • 지정일자

    1982.03.02

  • 소재지

    인천 남동구 운연동 343-1

  • 수량, 면적

    1,826㎡

  • 참조

    문화재청(이여발묘)

  • 문화재 설명

    - 조선의 무관인 이여발(1621∼1683)의 묘이다.
    - 이여발의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정익(貞翼)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의배(義培)의 손자로서 조선 효종 2년(1651) 무과에 급제, 비변랑(備邊郞), 도총사를 거쳐 숙천(肅川)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충청병마절도사를 거쳐 특히 회령(會寧)부사에 보직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는데,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으로서 야인(野人)들과 서로 무역하는 시장이 있어 야인상인들이 오는 정원도 없고 체류하는 기한도 없어서 우리의 피해가 많았다. 이때 이여발이 부임하여 상인의 출입인원을 320명 이내로, 체류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여 피해를 줄였다. 현종 때 병·공조참판에 특진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가 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연습시키는 한편 병기를 준비하여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어영대장, 한성부 좌·우윤을 역임하고 숙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사망하였다.
    -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문인석 한 쌍이 세워진 평범한 묘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분묘 앞 10여미터 아래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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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 남동구 운연동 343-1 한산이씨정익공파종중 2002.2.4
제62호 월성박씨종중묘역

월성박씨종중묘역

월성박씨종중묘역 사진

  • 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62호) 월성박씨 종중묘역

  • 지정일자

    2010.05.03

  • 소재지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산29-42외 2필지

  • 수량, 면적

    7,428㎡

  • 참조

    문화재청(월성박씨 종중 묘역)

  • 문화재 설명

    - 월성박씨(月城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제8왕자인 월성대군(月城大君)의 자손으로 고려 후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에 크게 융성하였다. 중시조인 박구(朴龜,1337∼1404)는 고려 중군사정부령(中軍司正副令)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이 곳에 칩거하면서 자신을 감춘다하여 호를 ‘장아(藏我)’라 하고 뒷산을 장아산이라 하였다. 장아산(해발 73.6m)서쪽 구릉에 위치한 월성박씨 종중 묘역에는 현재 박구와 그의 후손인 박간(朴幹), 박휘(朴徽), 박신겸(朴信謙),박호겸(朴好謙), 박홍중(朴弘中) 등 11기의 묘가 남아 있다. 그 중 통훈대부 추산(秋山) 박홍중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관직을 물러난 후 장아산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 묘역에 있는 봉분과 묘표, 문인석, 망주석,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교적인 묘제로서 특히 박휘와 박신겸, 박호겸의 묘표는 제작년대가 분명하여 조선 중기의 묘제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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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8㎡ 남동구 서창동 산29-41외 2필지 인천광역시
(월성박씨종중)
2010.5.3
제63호 이승훈묘

이승훈묘

이승훈묘 사진

  • 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기념물(제63호) 이승훈묘

  • 지정일자

    2011.12.29

  • 소재지

    인천 남동구 장수동 산132-1

  • 수량, 면적

    8,430㎡

  • 참조

    문화재청(이승훈묘)

  • 문화재 설명

    -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이승훈(1756~1801)의 묘이다.
    -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 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 이승훈은 1785년 서울 명동의 역관집안 출신인 김범우의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후, 몇 차례의 배교와 복교의 과정을 거치다가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정약조,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 비록 몇 차례 배교했으나 조선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던 이승훈의 유해는 만수동 남동 정수장 뒤편 초곡산에 묻혔으나 1981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 만이 그의 아들 택규, 신규의 묘와 함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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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0㎡ 남동구 장수동 산132-1 학교법인
인천카톨릭학원
2011.12.28

시지정 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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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명칭 수량(규모) 소재지 소유자(관리주체) 지정일시
제19호 장도포대지

장도포대지

장도포대지 사진

  • 명칭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제19호) 장도포대지

  • 지정일자

    2001.04.02

  • 소재지

    인천 남동구 논현동 111-13외 2필지

  • 수량, 면적

    2,275㎡

  • 참조

    문화재청(장도포대지)

  • 문화재 설명

    - 장도포대지는 조선 고종 16년(1879) 일본측이 서해안을 측량하면서 개항지를 탐색하는 것을 보고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을 대비하여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과 부평 연안에 화도진을 설치하고 포대를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서 1999년 "화도진도" 원본 확인을 통해 이곳에 3혈(穴)의 포대를 설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는 포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문헌에는 포좌 3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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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5㎡ 남동구 논현동 111-13 남동구 2001.4.2

시 등록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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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명칭 수량(규모) 소재지 소유자(관리주체) 지정일시
제4호 협궤 증기기관차 혀기-7형

협궤증기기관차 혀기-7형

  • 문화재명

    인천광역시 시등록문화재 유형문화재(제4호) 협궤증기기관차 혀기-7형

  • 지정일자

    2021.08.09

  • 소재지

    인천 남동구 아암대로 1605, 소래역사관 광장

  • 수량, 면적

    1량

  • 참조

    문화재청(협궤증기기관차 혀기7형)

  • 문화재 설명

    - 소래역사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협궤 증기기관차 ‘혀기-7형’은 1952년에 수원 기관차사무소에서 조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협궤용 증기기관차로 1978년까지 수인선 등에 운행되었음. 그 후 1983년 쌍용그룹에서 한국도로공사로 기증하여 대관령 휴게소에 전시되었다가, 2001년 인천광역시 남동구 담방문화근린공원 설치되었고, 2008년 현재 소래역사관 광장 앞에 이전 보수정비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협궤 증기기관차는 수인선‧수여선 운행 중단 이후 대부분 폐차되었고, 현재 국내에 6량만 현존하고 있는데 철도박물관에 보존(국가등록문화재)하고 있는 증기기관차와 같이 혀기-7형도 원형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국가적으로도 문화재로 보호할 희귀성이 있고, 현재 실제 운행되었던 소래역과 소래철교 인근에 전시되고 있어 소래포구만의 독특하고 지역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에 수원과 인천 사이에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오지 등을 통과하는 노선으로서 서민들의 발이 되고 주민들의 애환을 함께한 수인선 협궤 증기기관차는 인천의 근현대 지역사를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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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량 남동구 아암대로 1605,
소래역사관 광장
남동구 2021.8.9

국가지정문화재 및 등록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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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2호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장수동은행나무 사진

  • 명칭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제562호) 인천장수동은행나무

  • 지정일자

    2021.02.08.

  • 소재지

    인천 남동구 장수동 63-6외

  • 수량, 면적

    1주, 4,581㎡

  • 참조

    문화재청(인천장수동은행나무)

  • 문화재 설명

    - 은행나무는 높이 30m, 둘레 8.6m, 수령 800여년(추정)에 달하는 노거수(老巨樹)로 5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뻗어 있어 아름다운 수형(樹形)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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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 / 4,581㎡ 남동구 장수동 63-6 외 남동구 20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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