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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沸流)의 건국신화

서기전(西紀前) 36년 고구려 시조(始祖) 주몽(동명왕)이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나라를 세웠다.
부여왕(夫餘王)은 아들이 없었고 다만 딸이 셋이 있었다. 북부여(北夫餘)에서 난(難)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夫餘)로 망명(亡命)해온 주몽(朱夢)이 사람됨이 비범한 것을 안 부여왕 (夫餘王)은 그의 둘째딸 소서노(召西奴)를주몽에게 주어 처(妻)를 삼게 하였다. 얼마 아니 가서 왕이 죽으니, 주몽이 사위로 왕위를 이어받아 고구려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소서노(召西奴)는 과부(寡婦)로서 전처의 아들 비류(沸流)가 있었고, 주몽과의 사이에 온조(溫祚)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주몽은 북부여에 있을 때 이미 예씨(禮氏)라는 여자와 정혼(定婚)하여 유류((孺留) 또는 유리(孺璃)를 출산케 한 바 있었다. 그 유류가 장성한 후 아버지 주몽을 졸본부여로 찾아오니 주몽의 입장도 난처하고 동복이형제(同腹異兄弟)인 비류와 온조도 불안하던중에 주몽이 예씨의 소생인 유류를 태자(太子)로 세우니 비류등 동복 이형제는 주몽이 죽은 뒤에 닥쳐올 무서운 피해를 미리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모국(母國) 을 떠나 남하(南下)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 때 조우(鳥于), 馬자등의 10신(臣)이 따라오고 그 밖에 많은 백성들이 함께 남하하여,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삼각산(三角山)에 올라 주위를 두루 살펴 지세(地勢)를 관망할 때 따라온 10신(臣)이 말하기를 " 여기서 사방(四方)을 살펴보니 북쪽은 한수(漢水)를 끼고 수리(水利)가 매우 좋으며, 동편은 중첩된 높은 남악(南岳)을 싸안고, 남으로는 비옥한 택야(澤野)가 펼쳐 있으며 서쪽은 대해(大海)가 가로질러, 그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한 나라를 세울만한 곳으로는 다시 얻기 어려운 곳이니, 여기에 왕도(王都)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천리(天理)인가 하나이다." 라고 아뢰니, 온조가 비류에게 그 가부(可否)를 묻자 비류는 "아우나 여기(위례(慰禮))서 나라를 세우라, 내 생각 같아서는 이런 고원지세(高原地勢)에 나라를 세워보았댔자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길로 서쪽 해안지세(海岸地勢)로 나아가 평지에 도읍을 삼고 따로 나라를 세우겠 다." 고 말하니 10신(臣)이 다시 일제히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대신들을 인솔하고 서행(西行)하여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미추홀(彌鄒忽)]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때 는 고구려(高句麗) 2대 유리왕 2년이고 신라(新羅) 혁거세(赫居世) 40년 한성제(漢城帝) 가 홍(嘉鴻)3년(서기전 18년)이다.

비류가 문학산 일원(一圓)을 중심으로 [미추홀(彌鄒忽)]을 세워 백성을 다스려보니 원래 땅이 좁고 습(濕)한데 다가 해변이라 물이 짜서 많은 백성들이 정착생활(定着生活)하기에 매우 곤란하여 치국경영(治國經營)을 지속 시킬 수 없으므로 몇해 동안의 건국사업(建國事業)이 여의치 못하게 된 비류는 온조의 십제((十濟), 백제의 전신 (前身))를 살피기 위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찾아본 즉 도읍이 바로 잡히고 국기(國基)가 튼튼하여 백성이 안거 낙업(安居樂業)하고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 있어 마침 내 자결(自決)하니 그가 이끌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모여들어 그 때부터 백 성들이 즐겨 살게 되었다는 전설(傳說)이다.

줄타기 명수 김상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2년(年) 4월(月) 8일(日) 조(條)에「결사책진기악백호철연위악」(結絲冊陣技樂百 徹庭僞樂)이라 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2년(年) 5월조(月條)에 재악백희팔방공인(材樂百戱八方公人) 1350 여인개성실정태락(餘人皆盛飾庭泰樂)이라는 글이 있다.

우리나라 고대(古代) 백희중(百 中)에는 농환(籠丸), 주색(朱索)승도(繩渡), 줄타기, 번신(飜身)도약기(跳躍技), 땅재주, 봉(捧)놀이, 씨름 가면무(假面舞)놀이, 인형(人形)놀이, 사자춤등 지상(地上) 기예(技藝)무잉(無剩), 놀이들이 성행하였다. 약 200년(年) 전에는 인천 전재리(全才理)현 구월동(九月洞)에 줄을 잘 타는 재인(才人)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줄타기 (주색(走索) 또는 승도(繩渡)라 한다) 명수(名手)인 김가(金家)가 있었다. 헌종(憲宗)때 궁중(宮中)에 경사가 있었는데 그 때 전국에서 재인(才人)들을 뽑 아들여 각기 묘기를 부리게 하였다. 김상봉(金上峰)이 줄을 잘 타자 헌종은 그의 기술을 칭찬하고 「우두머리」라는 뜻의 상봉(上峰)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김상봉(金上奉)은 근세(近世) 줄타기의 중시조(中始祖)이다. 그는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 최가(崔家)인 제자는 왕(王)으로부터 상천(上天)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상천(上天)이란 줄타기 윗사람이란 뜻이다. 최상천(崔上天)은 한양(漢陽)으 김관포(金官포)와 광주(廣州)의 이풍운(李風雲)에게 전수시켜 줄타기 기법(技法)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줄타기 천재(天才) 김상봉(金上奉)의 기법(技法)은 우선 평지(平地)에 줄매기를 한다. 13m 거리의 양편에 가위 사복으로 약 7m 기둥을 양쪽에 세운다.

줄은 「8부」삼끈줄을 늘여 양쪽 말뚝에 단단히 매어 진동이 조금도 없게 한다. 줄을 탈 때에는 부채를 들고 버선발로 줄에 올라 줄 위에서 갖은 재담(才談)을 부리며 줄을 탄다. 그의 묘기(妙技)는 43가지나 된다.

김상봉(金上奉)의 43가지 묘기는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김상봉(金上奉)은 인천(仁川)의 큰 보배였다.

1. 앞으로 걸어가기 2. 뒤로걸어가기 3. 앞으로 종종걸음
4. 뒤로 종종걸음 5. 서서 돌아가기 6. 앉아 좌우로 돌기
7. 닭의 홰타기 8. 닭의 홰타고 좌우로 희기 9. 외홍채비
10. 외홍채비 풍치기 11. 양다리 외홍채비 12. 쌍홍채비
13. 겹쌍홍채비 14. 옆쌍홍채비 15. 옆쌍홍채비 거중틀기
16. 쌍홍채비 거중틀기 17. 외무릎 희기 18. 외무릎 치기
19. 오무릎 가새트름 20. 외무릎황새 두렁넘기 21. 외무릎 희기
22. 두무릎 풍치기 23. 두무릎 가새트름 24. 두무릎 황새 두렁넘기
25. 두무릎 종종 희기 26. 책상다리 27.책상풍치기
28. 책상가새트름 29. 책상다리 30. 앞쌍홍채비
31. 칠분뭔장 32. 앞칠보 춧칠보 33. 칠보 다래치기
34. 칠보 거중틀기 35. 허공채비 36. 앵금뛰기
37. 종급 붙이기 38. 칠보 보십배기 39. 깃발 붙이기
40. 배돛대서기 41. 살판 42. 얼음치기등

장사 추연도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추연도(秋淵道)는 조선말엽(朝鮮末葉)에 인천(仁川) 오동면(烏洞面) 안락(安樂)마을에서 평민 (平民)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대대로 영의정(領議政) 김재구(金在龜)의 묘지관리인(墓地管理人)이었다.
추연도(秋淵道)는 당시 세도가(勢道家)인 청풍김씨의 권세만 믿고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려 인천부관청(仁川府官廳)에서는 큰 골칫거리로 여겼으나 정승의 묘지기라서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다. 추장사(秋壯士)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피해자들의 고발이 빗발쳤으므로 인천부사(仁川府使)는 할 수 없이 그를 잡아들여 불량배(不良輩)라는 표시로 쇠를 달구어 얼굴에 쇠도 장을 찍어 내보냈다. 추장사(秋壯士)는 흉측한 얼굴을 하고도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여전히 행패를 부렸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자리를 피하였다.

추장사(秋壯士)가 한양(漢陽)에 가 있을 때 별안간 난리가 일어나 모두들 급히 피난을 가려 하였으나 성문(城門)이 굳게 닫혀 있어 나갈 수 없었다. 그 때 추장사(秋壯士)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성문(城門)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추장사(秋壯士)는 자물쇠를 맨손으로 비틀 어 부수고 성문(城門)을 열어 주어 모두들 안전하게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불량배라고 낙인 찍혔던 추장사(秋壯士)도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으니 사람들은 그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장사고을 팔장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임진왜란(壬辰倭亂)이후 우리나라는 피폐하여 관리(官吏)들이 수탈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도둑이 날뛰었다. 백성들은 도둑이 두려워 안심하고 잠 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천(仁川)에도 예외없이 도둑들이 들 끓었다. 인천(仁川)의 장자 (壯者)고을은 도로변(道路邊)이라서 주막집이 몇 집 있었다. 어느날 밤이 되자 수상한 장정 들 여러명이 주막을 찾아와서 술을 먹고는 떠나지 않았다.

주모가 그들의 눈치를 보니 도둑 같아서 몰래 자기 남편을 시켜서 동네 청년들에게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동네 팔장사(八壯士)는 도둑을 일망타진할 것을 굳게 결의하고 무기를 들고 도둑이 올 길목에 숨어 기다렸다.
자정쯤 되자 그 도둑들은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을 침입하여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하기 시작하였다.이 때 마을 팔장사(八壯士)는 도둑질 하기에 몰두해 있는 도둑들의 총과 무기를 빼앗고 그들을 붙잡았다.

도둑들을 끈으로 묶어 인천(仁川) 포도청에 넘겨졌다. 사또는 팔장사 (八壯士)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후부터는 팔장사(八壯士)가 두려워 장자(壯者)마을 근처 에는 도둑들이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첩열녀(童妾 烈女)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도림동(桃林洞) 오봉산(五奉山) 아래 길옆에는 인천(仁川)에서 가장크고 웅장한 신도비(神道碑) 가 서 있고 그 곳에서 약 200m쯤 떨어진 산 중턱에는 이조정종(李朝正宗)때 공조(工曹), 형 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조정만(趙正萬)의 산소와 그 아들 산소가 있다.

그 묘역(墓域)밖에 풀이 우거지고 칡넝쿨이 무성하게 덮인 한 작은 산소가 있다. 그 산소의 비석(碑石) 전면(前面)에는 열녀(烈女) 나주임씨지묘(羅州林氏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열녀(烈女) 나주임 씨지묘(羅州林氏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열녀(烈女)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나 오랜 풍 상을 지나면서 마멸되어 읽을 수 없다. 조판서(趙判書)는 호걸이어서 정실(正室)이 두명 있 었고 많은 소실(小室)을 거느렸었다.

조판서(趙判書)는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면서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연구하였으며 시 문서예(時文書藝)에 열중하면서 항상 여자를 곁에 두었다. 그는 83세에 20세의 나주임씨(羅州林氏)를 동첩(童妾)으로 맞이하였으나 같이 지낸지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조대감(趙大監)이 죽자 동첩(童妾)인 임씨(林氏)가 가장 슬퍼하였으며 영전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사를 치르고 며칠후에 그 동첩(童妾)은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뜻을 품고 스스로 자결(自決)하였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동첩열녀(童妾烈女)라 일컬어 칭송하였고 정종 (正宗)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려(烈女旌閭)를 내리셨다.

여무실(女舞室)의 유래(由來)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도림동(桃林洞)의 한 마을 이름이 여무실(女舞室)이다. 이 여무실(女舞室)은 옛날에 무당촌 (巫當村)이었다고 한다. 여무실(女舞室)이란 여자(女子)가 춤을 추는 집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이 마을에는 큰집을 지어 놓고 처녀를 뽑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妓生) 또는 무 당(巫堂)을 양성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무당(巫堂)이 굿하고 춤추는 집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인천(仁川)에는 여자(女子)가 붙은 마을이 두곳 있는데 하나는 여무실(女舞室)이고 또 하나 는 연희동(連喜洞)이다. 연희동(連喜洞)은 원래 여신동(女娠洞)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때 여 자(女字)와 선자(船字)는 불길(不吉)하고 천(賤)하다고 하여 여자(女字)를 다른 자(字)로 고 쳐 사용한 것이라 전한다.
<고증인(考證人) : 수산동(壽山洞) 송길용옹(宋吉用翁)>

발산리(鉢山里)의 세 부자(富者)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수산동)

옛날에는 수산동(壽山洞)을 발산리(鉢山里)라고 불렀는데 이 마을에 부자(富者)가 세집 있었 다고 한다. 그들 세 부자(富者)는 오륙백 석의 벼를 추수하는 부자로서 서로 더 부자가 되려 고 시샘을 하였다고 한다. 그 부자들은 서로 자랑을 하기 위하여 노적가리(野積場)를 높이 쌓았다고 한다.

이들은 쌓은 노적가리의 높이가 어찌나 높았던지 서로의 집을 넘겨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 부자(富者)는 어느 때 살았었는지 또 성(姓)이 무엇인지조차도 전하지 않는다.
<고증인(考證人) : 수산동(壽山洞) 송길용옹(宋吉用翁)>

용천(龍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간석 초등학교 북쪽 일대에 샘물이 솟는 곳이 있었는데 물이 맑고 깨끗해서 이웃마을 사람 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으며 물을 길러 온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솟구치는 물속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 갔다는 전설(傳說)이 있어 "용천"(龍泉)이라 일 컫게 되었다.

범아가리 대부도(大阜島)의 개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논현동(論峴洞) 호구포(虎口浦)를 범아가리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호구포(虎口浦)에 있는 오봉산(五峰山의 기슭에 커다랗고 검은 바위가 마치 큰 범이 입을 벌리고 으르렁대는 형상이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호구암(虎口岩)은 바다 건너 대부도(大阜島)를 집어 삼킬 듯이 응 시하고 있어 대부도(大阜島)에는 개가 번식이 안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개는 호 랑이의 밥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도(大阜島) 사람들은 개를 사다 놓으면 금방 죽어 버리기 때문에 호구암(虎口岩)을 몹시 싫어하였는데 호구암(虎口岩)이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염전(鹽田)을 만들 때 매몰된 후로는 대부도(大阜島)에 개가 잘 자란다고 한다.
<고증인(考證人) : 논현동(論峴洞) 吳在文翁>

뱀으로 망해버린 주안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경인국도(京仁國道)로 서울을 향(向)해 가다가 원통이 고개에 이르면 우편(右便) 주안산(朱雁山) 기슭에 약사암(藥師庵)이라는 절이 있다. 이 약사암은 최근(最近)에 창건(創建)한 절이 지만 이 곳에서 산정(山頂)을 향(向)해 올라가면 일대(一帶)에 주안사(朱雁寺)의 사지(寺址) 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구(卷九) 불자조(佛字條)를 보면 「주안사(朱雁寺 재주안산(在朱雁山)」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 주안사(朱雁寺)의 창건(創建)연대는 확 실(確實)치 못하나 사지(寺址)에서 채집(採集)된 자기편(磁器片) 等(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 려말기(高麗末期)가 아닌가 추측(推測)하고 있다.

이 주안사(朱雁寺)는 약(約) 150년전(年前) 까지도 법당(法堂)의 건물(建物)이 남아 있었는데 당시(當時)의 주지(住持)가 선행(善行)을 하지 않고 간악(奸惡)한 행위(行爲)만 하였기 때문에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떼뱀이 나타나서 이 절을 망(亡)쳐 놓았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요승(妖僧)이 나와서 주안산(朱雁山) 줄기의 산기(山氣)를 죽이는 부적을 붙였다는 「부적바위」가 있다.

지경소리처럼 속인 만세(萬歲)소리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만수동)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는 인천(仁川)에서도 벌어졌다. 인천읍내(仁川邑內), 관교동(官校洞), 간석동(間石洞), 만수동(萬壽洞) 등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사람들이 왜경(倭警) 에게 체포되었다. 주안(朱安)에서는 밤에 봉화(烽火)를 올리고 만세를 불러 왜경에게 체포 된 사람은 없었다.

1 주안동(朱安洞) 송내(松內)마을 사람들이 또 다시 만세를 부르려 하자 왜경들이 긴장하여 경계하였다.
하는수 없어 마을사람들은 편법을 쓰기로 하고 커다란 지 경돌에 팔방으로 새끼줄을 매어 이돌을 높이 올렸다 떨어뜨리며 집터를 닦았다. 지경돌을 높이 올렸다 떨어뜨릴 때 마다 "에이에라 지경이요, 대한독립만세"하고 지경소리와 만세 소리를 함께 지르니 멀리서 들으면 집터닦는 소리로 들려 무사히 만세를 불렸다고 한다.
<고증인(考證人) : 구연계옹(具然契翁)>

서창(西倉)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옛날에는 농지세를 현물세인 벼나 콩·잡곡등으로 징수하였는데 조선중엽에 인천 남촌면과 조동면 마을 사람들은 추수후에 나라에 내는 현물세와 봄부터 대여받은 장리벼의 원리를 합쳐 농가당 약 15섬씩이나 되는 벼를 20여리나 떨어진 북창이나 동창에 갖다내야 했다.

그런데 길이 좁아 우마차가 제대로 다닐 수 없었으므로 현물세를 내러가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이 때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서창이 설치된 것이다. 그 후 서창은 한양으로 가는 관문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당시 전국에는 10개소의 조창이 있어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세곡을 보관하였고 조창에 보관한 세곡은 정부의 수급계획에 의하여 한양으로 운반하였는데 전라·충청 지방의 공세관창(貢稅串倉)[아산(牙山)], 덕성창(德成倉)[익산(益山)], 법성포창(法聖浦倉)[영광(靈光)], 영산창(榮山倉)[나주(羅州)]등 4개소에서 보관한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용산창(龍山倉)과 함께 야적장으로 큰역할을 하였다.

인천시(仁川市) 시청(市廳)터 정각(正閣)골 (위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의 새 청사(廳舍)가 세워진 곳이 정각